2011-04-11

부처가 말하는 깨달음이란 (정현철님의 글)

불교 가르침대로 보면, 집착을 버려야 행복을 얻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걸 지엽적인 의미로 보면 돈, 명예, 등 그런 것일 테지만 그러나 보다 정확한,, 진짜 근본적으로 버리라는 것은 자기 에고인데요. 사실, 돈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이나 지나친 무소유 관념, 그런 것도 제가 볼 떈 오히려 또다른 집착 같아요.. 단지 방향만 다를 뿐,,,

자신의 에고를 버리고 진아(참다운 나)를 깨달을 때 세상의 근본적인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 이게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던데,,, 어떤 명상 책을 봐도 끊임없이 진아를 깨달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걸 알아야 가짜 나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되고 그래야 거기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

불교에서는 감정을 에고의 산물로 보고 있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해탈은 감정적인 고통을 피하고 즐거우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되려 그런 감정 자체를 초월하라는 것,.,.
기쁨과 고통을 피하지 말고 온전히 겪되, 거기에 지배당하지 말라는 것..
철저히 모든 감정을 겪되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고 주인이 되라는 것이고, 진아를 깨달을 때만이 그것이 가능하다 말하는데요.

화가 나면,, 사람들은 그 감정에 따라 행동합니다. 왜냐면, 내가 화를 내는 거니까..
화 = 나. , 그래서 감정이 시키는대로 다 하죠. 화가 나면 때리고, 두려우면 도망가고.. 만약 화를 참아야 될 상황이라면 마치 자신이 굴복한 듯한 대단한 굴욕감을 느끼죠. 그 화는 곧 나니까

반면 불교에서는 그걸 에고의 산물이라 보기 때문에
화, = 나 가 아니라 내가 화라는 감정을 가진 것이고,, 화라는 감정과 나를 분리합니다. 그럴 때, 감정을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린 고통이란 감정마져 즐길 수 있게 됩니다.
감정적으로 괴롭지만 그걸 즐긴다?? 얼핏 모순된 말 같지만, 진아를 깨달으면 그게 가능하고 우린 이미 그런 모순된 상황을 다들 경험했습니다, 다만 자신의 경험에서 깨닫지 못할 뿐,...


진아를 깨닫고 못 개달을 때의 감정적인 고통의 차이,, 그걸 이해하기 쉽게 말해 보면,
공포영화 볼 때,, 놀이기구에서 느끼는 그 공포를 우리는 즐깁니다.,,, 즉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감정 자체는 즐길 수 있습니다. 근데 같은 감정이여도 살인마 나오는 공포영화는 즐기지만 실제 내가 살인마에게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는 즐기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똑같은 공포를 느껴도 진아를 깨달은 사람과 못 깨달은 사람이 느끼는 차이 입니다.
진아를 깨달으면 우리가 겪는 세상의 모든 감정이 이 공포영화 볼 때처럼,,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럴 때 우리는 감정적인 고통을 느끼되, 거기에 매몰되서 휩쓸리지 않게 돼죠. 공포영화 볼 떄 무섭지만 그게 실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우린 그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중심을 지킬 수 있죠.

부처가 말하는 해탈 한다는 것, 사바 세계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 합니다.



이렇게 결코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중심,,, 즉 진아를 깨달으면 우린 더 이상 어떤 고통도 두렵지 않습니다. 되려 세상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란 감정을 즐기게 됩니다.
진짜 삶을 살게 되는 거죠. 날씨를 봐도 좋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는 것처럼 인생도 마찬가지인데 즐거울 땐 즐거움을 느끼고 슬플 땐 슬픔을 철저히 느끼고,
근본적으로 모든 순간을 철저히 느끼는 것, 이게 바로 살아있음을 즐기는 것이죠.
죽으면 아무 것도 못 느끼니까...

부처가 생사를 초월한했다는 말 역시 이와 일맥상통하는데 우리의 진아는 살고 죽는 게 없습니다. 우리의 진아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해하던 그것 입니다.
자기가 태어나기 이전에 나는 뭐였을까요? 그게 바로 진아 입니다.

진아를 깨닫는다는 것은 애초에 살고 죽고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
부처는 그걸 깨닫고 생사를 초월햇다고 말했죠.
더 쉽게 예를 들면,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매트릭스 안에서의 죽음(에고의 소멸),,,, 그렇지만 우리 진짜 몸(진아)은 매트릭스 기계 안에 있죠. 매트릭스 안의 가상 현실에서의 죽음은 진짜 자기가 죽은 게 아닙니다.
부처는 이 세계를 매트릭스 안의 가상현실처럼 본 거죠. 매트릭스 안에서 우리가 ~나~ 라고 알고 있는 존재는 에고일 뿐이고 에고의 죽음일 뿐,, 즉 진아를 깨달을 때만이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근본적으로 생사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부처가 생사를 초월했다는 건 애초에 살고 죽는 게 없다는 걸 개달았다는 것 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아무리 깨달음의 경지가 높고 어쩌고 해도 사실 살면서 감정적인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뇌에서 감정을 담당하는 부위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 합니다. . 부처 역시 살아 생전 분명 제자들에게 화내고 스스로 자책하고 다른 인간들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겁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보나마나죠.
, 부처는 감정적인 즐거움과 평화를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 게 아니라 아예 감정을 초월하라고 가르쳤죠. 감정을 초워랬을 때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있다 말합니다. 그 평화는 감정적인 쾌락, 즐거움 그런 것과는 좀 다른 의미.

여기서 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감정을 초월하라는 말이 감정을 느끼지 말고 억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감정에 매몰되지 말라는 거죠.

그리고 사실 두려움이나 불안등의 감정이 고통스럽다고 그런 감정을 피하고 억압하면 되려 그게 지나가지 못하고 자기 내면에 쌓이게 되서 더 고통을 겪는데요.
그래서 심리학 관련 학계나 각지의 명상 단체 등에서는 마음껏 자기 분노와 두려움의 감정을 표현하는 곳이 있습니다. 아마 티비에서 본 분도 있을 건데 미친듯이 울고 춤추고 하는 그런 곳이 잇어요, 교회에서도 보면 아주 미친년처럼 울어되는 사람들이 잇는데 그게 다 자기 감정 정화하는 거죠. 그런 사람들은 교회나가는 게 큰 도움이 됩ㄴ디ㅏ.
두려우면 그걸 억압하지 말고 더욱 과장해서 두려워하면, 되려 그런 감정들은 더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그 두려움은 사라지고,,,,
울지 말라고 하면 더욱 울음이 나는 현상,. 웃지 말라고 하면 더욱 웃음이 나고,,,, 자살시도했다가 병원에서 깨어난 사람은 당장은 엄청난 삶의 욕구를 느낀다고 하네요.


글이 기니 여기서 끝내고,
다음에 시간 날 때 화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적어 보겠습니다. 솔직히 여기까지 누가 읽어 보기나 할까 싶긴 한데,

화라는 감정을 다루는 시중의 책들을 들여다 본 결과, 부분적으론 괜찮긴 한데 완전 만족스런 책은 단 한 권도 없었습니다. 화는 절대 참아선 안 되죠. 다만 표현하는 방법의 문제 입니다.

1 comment:

Unknown said...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참 나를 찾는 것이 깨달음인 것 같습니다. 아직 무엇인지는 몰라도 진짜 나는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먼가 알 듯 말 듯 한데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군요.
죽기 전에 죽어서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꺠달음이다. 란 말을 제일 좋아합니다. 님의 글을 읽으니 하루빨리 꺠달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